안산순례길2015
순례에 부쳐
국가가 만들고 국가가 버리는 삶. 아니 버리기 위해 국가가 만들고 만들기 위해 국가가 버리는 삶. 아니 이 모든 국가의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이어지는 삶. 이 진술은 안산시의 과거와 현재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진술은 여전히 추상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산업도시 건설이라는 국가의 계획에 따라 1970년대말부터 추진된 안산시의 개발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동반하였다. 고향 땅에서 태어나 자란 원주민은 자신의 터전에서 추방됐고 미래를 꿈꾸며 이주한 시민들은 약속받았던 삶의 질을 얻지 못했다. 해외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휩쓸려 들어왔고 또 휩쓸려 나갔다.
하지만 안산의 시민들은 어떻게든 잘 살기 위해, 함께 잘 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서해안 산업벨트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바라보며 생산활동에 매진하고 있고, 이주노동자들과 지역주민들은 다문화특구에서 음식과 웃음을 나누며 공존하려 한다.
그러던 와중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국가는 버려져야 할 노후한 배를 운영하게 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라는 이름의 이 배를 탄 304명의 생명들이 말그대로 죽게 내버려뒀다. 가라앉는 배를 눈앞에 두고 국가는 구조의 책임을 방기했다.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책임을 버렸다.
그 버려진 304명의 생명들 속에는 250명의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과 11명의 교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이후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은 구조와 진상규명을 위해 국가와 싸워야 했다. 자식들이, 가족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기 위해 국가와 싸워야 했다. 그들의 죽임이 헛되지 않도록 안전한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런데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이 당연한 요구가 왜 국가와의 싸움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국가가 생명의 희생을 반복적으로 불러온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산업쓰레기로 처분됐어야 했을 배를 저급의 관광상품으로 유지했다. 그리고 그것을 엉망으로 관리했다. 그 결과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마치 1970년대 말 안산시에 부적격 공장들이 계획적으로 배치되고 재활용된 것처럼,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부실과 졸속이 야기된 것처럼, 그로 인해 수많은 비참과 절망이 양산된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 안산시민들은 국가와 싸우기보다 새로운 희망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 경제특구와 문화특구라는 해법이 적용될 수 없다. 수많은 억울한 희생 앞에서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차라리 죽음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이 죽음과 연루된 모든 잘못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다. 죄의 앙갚음이 아니라 죄의 씻어냄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애도할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산자와 죽은자는 서로를 품을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미래조차도 슬픔에 잠긴 미래이다. 우리가 천국의 해변에 다다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옥의 기억들이 죽은 조개 껍질처럼 쌓이고 또 쌓여 이루어진 천국의 해변일 것이다.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허락될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피로 오염된 유토피아일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조차 지난한 싸움 없이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그리고 우리는 요구하고 있다. 국가여, 정치적 제스쳐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지 말라. 국가여, 죄의 씻김에 동참하라. 국가여,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슬픈 사람이 되어라.
<안산순례길>은 이 죄의 씻김에 참여하는 하나의 방편이리라. 기획자가 나에게 참여를 요청했을 때, 나를 설득시킨 것은 사실 기획자의 취지나 의도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요청은 하나의 명령으로 다가왔다. 기획자의 명령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명령으로. 순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 고취의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나에겐 섬겨야 할 신이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순례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죄의 씻김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인가?
순례길을 먼저 떠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희생자 가족들이다. 어떤 분은 아들의 시신을 건진 어부를 찾아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섬을 찾았다. 그분은 거기서 진상규명을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진도 부근의 조도, 동거차도, 서거차도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구해줬던 어부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희생자 가족들은 특별법 제정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최근에는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간담회에 참여하여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진상규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행보를 순례라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상규명이라는, 죄의 씻김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안산은 어떤가? 아이들의 기억과 삶이 가장 많이, 가장 오래, 가장 깊게 깃들어 있던 안산에서 죄의 씻김을 위한 의례는 이루어지고 있는가?
단원고 2학년 6반 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정부자씨는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를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부자씨는 이제 그만하자는 이웃들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 또한 안산에 사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호성이가 살았던 안산에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안산은 예전부터 자주 아팠던 곳이었다. 그렇게 아팠어도 안산 시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옛날 공장들이 버티면 새 공장이 들어와 활력을 더했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했고 서울에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안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번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안산을 덮쳤다. 용서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죄, 모두가 죄인인 죄,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죄를 씻어낼 수밖에 없는 죄가 안산과 나라 전체를 거대한 아픔에 잠기게 했다.
나를 포함해 순례길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 거대한 아픔의 부름에, 죄씻김의 요청에 응답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픔은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아픔의 한가운데 있는 당사자만이 “안산이 너무 아파요. 안쓰러워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다만 그 아픔 곁을 맴도는 것, 아픔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 목소리에 화답하는 것, 그것 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라도 죄의 씻김에 동참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작가들은 예술의 이름으로 그 아픔의 무게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그 아픔에 대해 어찌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어떤 작가들은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고 개인 작업으로 여기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 어떻게 개인 작업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안산의 역사와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작업이 감히 ‘나의 작업’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작가들은 순례길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 최소치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비겁함이자 용기이다. 예술은 우리의 비겁함을 감추는 도구이자 우리가 용기를 내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그저 안산을 걷고 또 걷는다. 몇 가지 작업 아이디어들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곧 다른 생각들에 휩쓸려버린다.
우리는 안산의 아픔을 계속 떠올린다. 호성이 엄마 정부자씨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들렸던 떡볶이 집 단골 중에 한 둘은 사라진 아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원고 앞의 공원 평상에 앉았을 때, 바로 이 자리에 사라진 아이들 몇몇이 앉아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다른 생각들도 있다. 작업에 대한 생각보다 4월 16일과 4월 18일 광화문 광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생각이 앞선다. 경찰들에 둘러싸이고 잡혀가는 유가족들의 절규와 호소가 자꾸만 떠오른다.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의 작업이 도대체 이 현실 속에서 무슨 역할을,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예술이 뭐가 그리도 중요한가? 예술로 감히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작가는 내게 고백했다.
소설가 한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공수부대에게 죽임을 당한 한 중학생의 이야기를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의 소설로 썼다. 동호라는 이름의 그 중학생은 실존 인물이었다. 한강은 동호의 형님에게 동생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되겠냐며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형님이 말했다.
한강에게 이 요청은 얼마나 엄정한 것이었을까? 한강에게 이 요청은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었을까, 쓰지 못하게 하는 힘이었을까?
물론 순례길에 참여한 작가 중 누구도 이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환청처럼 그 요청이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그 요청에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소리를 귓전에서 떨쳐낼 수도 없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덧붙여서 이런 말을 했다. “문화적 지성은 자족적 명상에 머무르는 한 현대의 야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도르노의 말을 계속해서 떠올린다. 그의 말은 내게 이 시대를 물들인 죄의 검은 물결에서 예술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술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겠노라는 선포 자체가 추악한 야만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두 가지 다른 대답이 가능하다. 프리모 레비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아우슈비츠를 증언하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 반면에 오에 겐자부로는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3.11 이후 일본의 야만과 싸우기 위해 절필을 했다. 한 사람은 펜을 들었고 한 사람은 펜을 꺾었다. 둘의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야만을 증언하고 야만과 싸우는 것이 그들이 펜을 들고 꺾은 이유였다.
그러니 우리는 순례라는 죄씻김의 길에서 예술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목격하고 증언하기 위해 작가가 될 수도 있고 목격하고 증언하기 위해 작가를 그만둘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술의 도구를 내려놓는 듯하다 부여잡을 것이고 부여잡는 듯하다 내려놓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도구를 손에 쥐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이 혼란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을 숙명처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치 순례자의 지팡이처럼 예술을 대하게 될 것이다. 순례자의 지팡이가 그의 순례길에 특별한 상징인 동시에 그의 걸음을 돕는 유용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순례자의 지팡이에 푸른싹이 돋는 죄씻김의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그 다다를 수 없는 장구한 시간 동안, 그것은 그저 죽은 나무로 만든 볼품없는 지팡이에 불과한 것처럼.
대표집필 심보선
이 글은 ‘안산순례길2015’ 책자에 수록된 원문입니다.
이 글의 무단 전제를 금합니다.
이 글의 사용과 관련해서는 caminodeansan@gmail.com으로 문의해 주십시오.
산업도시 건설이라는 국가의 계획에 따라 1970년대말부터 추진된 안산시의 개발은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동반하였다. 고향 땅에서 태어나 자란 원주민은 자신의 터전에서 추방됐고 미래를 꿈꾸며 이주한 시민들은 약속받았던 삶의 질을 얻지 못했다. 해외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휩쓸려 들어왔고 또 휩쓸려 나갔다.
하지만 안산의 시민들은 어떻게든 잘 살기 위해, 함께 잘 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서해안 산업벨트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바라보며 생산활동에 매진하고 있고, 이주노동자들과 지역주민들은 다문화특구에서 음식과 웃음을 나누며 공존하려 한다.
그러던 와중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국가는 버려져야 할 노후한 배를 운영하게 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라는 이름의 이 배를 탄 304명의 생명들이 말그대로 죽게 내버려뒀다. 가라앉는 배를 눈앞에 두고 국가는 구조의 책임을 방기했다. 그냥 방기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책임을 버렸다.
그 버려진 304명의 생명들 속에는 250명의 안산시 단원고 학생들과 11명의 교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이후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은 구조와 진상규명을 위해 국가와 싸워야 했다. 자식들이, 가족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기 위해 국가와 싸워야 했다. 그들의 죽임이 헛되지 않도록 안전한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런데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이 당연한 요구가 왜 국가와의 싸움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국가가 생명의 희생을 반복적으로 불러온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산업쓰레기로 처분됐어야 했을 배를 저급의 관광상품으로 유지했다. 그리고 그것을 엉망으로 관리했다. 그 결과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마치 1970년대 말 안산시에 부적격 공장들이 계획적으로 배치되고 재활용된 것처럼,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부실과 졸속이 야기된 것처럼, 그로 인해 수많은 비참과 절망이 양산된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 안산시민들은 국가와 싸우기보다 새로운 희망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 경제특구와 문화특구라는 해법이 적용될 수 없다. 수많은 억울한 희생 앞에서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차라리 죽음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이 죽음과 연루된 모든 잘못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다. 죄의 앙갚음이 아니라 죄의 씻어냄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애도할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산자와 죽은자는 서로를 품을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미래조차도 슬픔에 잠긴 미래이다. 우리가 천국의 해변에 다다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옥의 기억들이 죽은 조개 껍질처럼 쌓이고 또 쌓여 이루어진 천국의 해변일 것이다.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허락될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피로 오염된 유토피아일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조차 지난한 싸움 없이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그리고 우리는 요구하고 있다. 국가여, 정치적 제스쳐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지 말라. 국가여, 죄의 씻김에 동참하라. 국가여,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슬픈 사람이 되어라.
<안산순례길>은 이 죄의 씻김에 참여하는 하나의 방편이리라. 기획자가 나에게 참여를 요청했을 때, 나를 설득시킨 것은 사실 기획자의 취지나 의도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요청은 하나의 명령으로 다가왔다. 기획자의 명령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명령으로. 순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 고취의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나에겐 섬겨야 할 신이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순례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죄의 씻김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인가?
순례길을 먼저 떠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희생자 가족들이다. 어떤 분은 아들의 시신을 건진 어부를 찾아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섬을 찾았다. 그분은 거기서 진상규명을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진도 부근의 조도, 동거차도, 서거차도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구해줬던 어부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희생자 가족들은 특별법 제정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최근에는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간담회에 참여하여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진상규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행보를 순례라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상규명이라는, 죄의 씻김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안산은 어떤가? 아이들의 기억과 삶이 가장 많이, 가장 오래, 가장 깊게 깃들어 있던 안산에서 죄의 씻김을 위한 의례는 이루어지고 있는가?
단원고 2학년 6반 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정부자씨는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를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국을 다녀보니까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가 안산이 더 심한 거 같더라고요. ‘안산’하면 공단, 외국인 노동자, 사건 사고 많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제 거기다가 세월호까지 얹어진 거예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그게 싫은 거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여기가 우리 애들 시험 끝나면 조잘대면서 걸어다니고, PC방 가고, 노래방 가고, 떡볶이 사먹던 동네잖아요. 그럼 하다못해 단골집도 많았을 텐데, 우리가 이렇게 소리를 쳐도 그분들은 안 나오시더라고요. 그분들 나오면 손 잡고 ‘우리 애들 어땠어요?’라고 물어보고 싶은데. 그분들도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이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요? 지금도 그 아이들이 혼이 되어 바글바글 돌아다닐 것 같은데, 여기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빠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안산이 너무 아파요. 안쓰러워요.”
정부자씨는 이제 그만하자는 이웃들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 또한 안산에 사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호성이가 살았던 안산에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안산이 너무 아파요. 안쓰러워요.”
안산은 예전부터 자주 아팠던 곳이었다. 그렇게 아팠어도 안산 시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옛날 공장들이 버티면 새 공장이 들어와 활력을 더했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했고 서울에 집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안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번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안산을 덮쳤다. 용서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죄, 모두가 죄인인 죄,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죄를 씻어낼 수밖에 없는 죄가 안산과 나라 전체를 거대한 아픔에 잠기게 했다.
나를 포함해 순례길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 거대한 아픔의 부름에, 죄씻김의 요청에 응답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픔은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다. 아픔의 한가운데 있는 당사자만이 “안산이 너무 아파요. 안쓰러워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다만 그 아픔 곁을 맴도는 것, 아픔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 목소리에 화답하는 것, 그것 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라도 죄의 씻김에 동참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작가들은 예술의 이름으로 그 아픔의 무게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그 아픔에 대해 어찌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어떤 작가들은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고 개인 작업으로 여기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 어떻게 개인 작업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안산의 역사와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작업이 감히 ‘나의 작업’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작가들은 순례길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 최소치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비겁함이자 용기이다. 예술은 우리의 비겁함을 감추는 도구이자 우리가 용기를 내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그저 안산을 걷고 또 걷는다. 몇 가지 작업 아이디어들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곧 다른 생각들에 휩쓸려버린다.
우리는 안산의 아픔을 계속 떠올린다. 호성이 엄마 정부자씨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들렸던 떡볶이 집 단골 중에 한 둘은 사라진 아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원고 앞의 공원 평상에 앉았을 때, 바로 이 자리에 사라진 아이들 몇몇이 앉아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작가는 말한다.
“순례길을 걸을 때, 내 곁에 희생자 가족이 함께 걷고 있다고 생각하겠다.”
그리고 다른 생각들도 있다. 작업에 대한 생각보다 4월 16일과 4월 18일 광화문 광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생각이 앞선다. 경찰들에 둘러싸이고 잡혀가는 유가족들의 절규와 호소가 자꾸만 떠오른다.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의 작업이 도대체 이 현실 속에서 무슨 역할을,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예술이 뭐가 그리도 중요한가? 예술로 감히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작가는 내게 고백했다.
“사실 두렵다. 하지만 두렵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야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두렵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면 그때는 이미 못하겠다는 마음을 굳힌 다음일 것이다.”
소설가 한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공수부대에게 죽임을 당한 한 중학생의 이야기를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의 소설로 썼다. 동호라는 이름의 그 중학생은 실존 인물이었다. 한강은 동호의 형님에게 동생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되겠냐며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형님이 말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한강에게 이 요청은 얼마나 엄정한 것이었을까? 한강에게 이 요청은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었을까, 쓰지 못하게 하는 힘이었을까?
물론 순례길에 참여한 작가 중 누구도 이런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환청처럼 그 요청이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그 요청에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소리를 귓전에서 떨쳐낼 수도 없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덧붙여서 이런 말을 했다. “문화적 지성은 자족적 명상에 머무르는 한 현대의 야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도르노의 말을 계속해서 떠올린다. 그의 말은 내게 이 시대를 물들인 죄의 검은 물결에서 예술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술의 이름으로 죄를 사하겠노라는 선포 자체가 추악한 야만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두 가지 다른 대답이 가능하다. 프리모 레비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아우슈비츠를 증언하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 반면에 오에 겐자부로는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3.11 이후 일본의 야만과 싸우기 위해 절필을 했다. 한 사람은 펜을 들었고 한 사람은 펜을 꺾었다. 둘의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야만을 증언하고 야만과 싸우는 것이 그들이 펜을 들고 꺾은 이유였다.
그러니 우리는 순례라는 죄씻김의 길에서 예술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목격하고 증언하기 위해 작가가 될 수도 있고 목격하고 증언하기 위해 작가를 그만둘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술의 도구를 내려놓는 듯하다 부여잡을 것이고 부여잡는 듯하다 내려놓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도구를 손에 쥐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이 혼란은 아주 오래 갈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을 숙명처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치 순례자의 지팡이처럼 예술을 대하게 될 것이다. 순례자의 지팡이가 그의 순례길에 특별한 상징인 동시에 그의 걸음을 돕는 유용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순례자의 지팡이에 푸른싹이 돋는 죄씻김의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그 다다를 수 없는 장구한 시간 동안, 그것은 그저 죽은 나무로 만든 볼품없는 지팡이에 불과한 것처럼.
대표집필 심보선
이 글은 ‘안산순례길2015’ 책자에 수록된 원문입니다.
이 글의 무단 전제를 금합니다.
이 글의 사용과 관련해서는 caminodeansan@gmail.com으로 문의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