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순례길2015

순례에 부쳐



2016년 5월 지난해에 이어 다시 안산을 걷는다. 지난해 우리는 ‘국가가 만들고 국가가 버리는 삶, 아니 버리기 위해 국가가 만들고 만들기 위해 국가가 버리는 삶, 아니 이 모든 국가의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이어지는 삶’이라는 관점에서 안산의 역사와 세월호 참사를 순례라는 ‘몸의 체험’으로 연결짓고 감각하고 사유하고자 했다.

윤한솔 총연출은 2016년 안산순례길을 위한 연출 메모에서 조르주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에 의존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각자의 생물학적, 개인적 생명을 초월한 가치나 문맥을 상실하고 단지 ‘그럼에도, 그래도 살아있다’라는 사실성에 노출되는 것. 안산순례길은 이 벌거벗은 개인들이 그 누구의 강제에 의하지 않고 개인이 자기조직적인 집단, 운동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말과 행동은 궁극적으로 국가를 향할 수밖에 없다. 헌법에는 분명히 명시돼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10조) 또한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 34조 6항)

이는 국가가 ‘법적으로’ 인간이 단지 생존에 연연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에 존엄을 부여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함을 뜻한다.

그런데 헌법이 명시하는 그같은 국가의 의무는 세월호 참사에서 철저히 방기되고 말았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청문회 과정은 “자신들은 할만큼 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식의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국가의 무지와 기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국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국가는 저열한 방식으로 자신을 향한 비판적 말과 행동을 봉쇄했다. 예술에 대한 공적지원 사업에서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다루는 것은 ‘국가’에게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안산순례길’ 또한 세월호를 다뤘다는 이유로 심사과정에서 배제된 사실이 드러났다. 안산순례길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에 대해 “우리는 계속해서 안산순례길을 이어가겠다”는 다짐과 약속으로 대응했다.

그리하여 2016년 봄이 왔다. 다시한번 안산순례길은 그 걸음을 내딛는다. 2015년 안산순례길의 기본 뼈대가 ‘국가비판’이었다면 2016년 안산순례길은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세월호 참사가 드러낸 또 다른 차원, 즉 일상과 개인의 삶에 주목한다.

사실 일상은 국가라는 관료제 기계 못지 않게 문제와 비판을 무마시키는 기계이다. 일상이라는 기계의 핵심은 반복이다. 나날이 반복되는 일상의 루틴 속에서 삶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외부의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신의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다. 일상은 망각 속에서 자신의 평온을 유지시킨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은 이러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은 일상이 파괴된 삶, 죽어간 가족들의 해원이라는 사적 소망과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라는 공적 사명이 일상을 대체해버린 삶, 일상의 수다와 웃음이 낯설고 죄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을 폄하하는 목소리 또한 일상의 관점에서 제기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등등. 세월호 참사를 환기시키고 아직도 물속에 9명의 실종자가 있음을 주지시키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일상의 정상적 질서와 평화를 교란시키는 불온한 움직임으로 여겨진다.

안산순례길에 참여한 작가들은 어떨까? 그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 또한 평온을 원할 것이다. 안정적인 창작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과 창작은 이제 달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 차이를 감수한다. 나아가 그들은 일상과 창작 속에 자리잡은 그 차이를,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그 차이를, 고통스럽고 불편한 그 차이를, 다시금 자신의 삶과 작업 속에 재투입한다.

예를 들어 김민정 연출에게 안산은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그녀는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대화와 작업을 나누며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그녀 또한 고통에 물든다. 그러나 그녀는 혼란과 고통 속에서 안산의 길들을 더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아이들이 돌아다녔던 길들. 아이들의 일상이었던 길들을. 고주영 프로듀서는 말한다.

“안산순례길은 무엇보다도 참여하는 작가들에게 중요한 약속, 행동의 방식이 되어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작업이 아니었다면 우리 역시 기억이 점점 흐릿해진 채 일상으로 슬쩍 돌아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윤한솔 총연출은 2016년 안산순례길에 대한 메모에서 이렇게 말한다.

“안산순례길은 무의미함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개인들의 연대이다.
작년 단원고의 교실을 둘러보고는 말을 잃었다. 주인을 잃은 교실에 부재하는 주인들의 웅성임에 압도되고 말았다. 이 웅성임은 감춰진 것들을 드러냈고 이렇게 드러난 민낯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일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억울한 일로 세상을 떠난 자들/ 귀신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목소리를 더듬는다/목소리를 걷는다.”

지치고 우울한 우리는 일상의 평온으로 돌아가고 싶은만큼 또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우리는 끊임없이 웅성거린다. 이 웅성임에는 흐느낌과 연설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일상과 비일상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공과 사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개인과 국가의 차이가 없다. 이 웅성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 <안산순례길2016>은 이 웅성임이 흩어지고 모이는 갈림길과 교차로, 멈춤과 움직임들로 이루어져 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우리가 그토록 반복적으로 되씹는 이유는 실은 그만큼 모든 사건과 죽음은 한발만 옆으로 내디뎌도 망각으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 사건과 죽음이 너무나 부당하고 말이 안되고 고통스럽다 해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일상은 개인의 삶 여기저기에 행복과 성장의 깃발을 휘날리며 그 망각의 힘을 관철시킨다.

<안산순례길2016>은 희생자의 말, 생존자의 말, 법의 말, 국가의 말, 심지어 가해자의 말을 우리의 입으로 중얼거리고 그 중얼거림을 공통의 웅성임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공통의 웅성임, 이것은 막강한 망각의 힘을 거스르려는 우리의 모험, 몸짓, 목소리, 노래, 춤, 싸움, 무기에 다름 아니다.



대표집필  심보선
이 글은 ‘안산순례길2016’ 책자에 수록된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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