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순례길2016

︎아이들의 길




무브먼트 당당(안산순례길개척위원회 참여 2015-2017)은 2016년 안산순례길에서 여섯명 아이들의 길을 만들었다.

2015년 당당이 무대에 올린 <그날, 당신도 말 할 수 있나요>라는 공연을 통해 인연이 닿은 부모님들과 만나 안산순례길의 의미를 나누고, 안산에서 아이들을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장소들을 제안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함께 걸었다. 안산 곳곳에는 희생된 아이들과 가족들의 기억이 스며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돌아다녔을 길들, 아이들의 일상이었을 길들, 아이들 몇몇이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지 모르는 길들. 아이들과 가족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순간들은 그 길에 오롯이 담겨 남아 있다.
이영만, 임세희, 허다윤, 박성호, 노준영, 김시연 이 여섯 개의 길을 시작으로 4.16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의미있는 길들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하였다. 그 누구라도 아이들의 길을 만들고 찾아내고 기록하고 기억하게 되기를. 그래서 안산을 지우려는 개발의 광풍에도 사라지지 않을 기억과 약속의 길이 더더욱 많이 생겨나길 간절히 바랬다. 아이들의 길은 <안산순례길2016>에 포함되어 순례자들이 함께 걸었다. 다만 순례자들은 자신이 걸은 길이 아이들의 길 임을 공연후 책자를 통해 알수 있도록 안내 되었다.

※ 4.16기억저장소가 그래픽으로 재작업한 아이들의 길 이미지를 싣습니다.




이영만의 길

이영만군의 장례를 치룬 한도병원 앞 큰 길을 따라가면 영만군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안산빌라가 보인다. 영만군은 안산빌라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단원고를 다녔다.
영만군은 늘 달렸다. 집 앞에 직선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신호등이 3개 정도 있는데 신호에 걸리지 않고 달리면 버스보다 빨랐다. 어릴 때부터 밖에만 나오면 아파트 계단에서부터 뛰기 시작했고 엄마가 두부 심부름이라도 시키는 날에는 달리기 시합하듯 엄마에게 베란다에서 보고계시라고 하고 슈퍼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그 베란다에서 엄마는 아침마다 영만군이 집에서 나와 손을 흔들고 버스를 타러 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학여행 당일날 영만군이 버스를 타러 나간 후 아무래도 용돈을 너무 적게 준 것 같은 생각에 엄마는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영만군을 쫓아갔다. 캐리어 들고 뛰어가는 아들을 신호등 앞에서 겨우 잡았고 그렇게 주머니에 있던 몇 만원을 더 주고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뒷모습을 쳐다봤다. 안산빌라에서 한도병원사거리가 영만군의 길이다. 영만군을 보내고 나서 매일밤 영만군이 돌아오던 시간인 10:30쯤 하늘을 쳐다보는데 늘 별하나가 유난히 반짝거리며 떠 있다고 했다. 안산빌라 건너편 선일 중학교는 영만군이 다녔던 중학교다.
학교 앞 아파트에서 영만군이 10살부터 살았는데 영만군의 집이었던 5층에서는 학교 운동장이 훤히 보인다. 엄마는 영만군이 등교해 교문을 지나서 교실 현관 앞에서 신발 갈아 신고 들어가는 것까지 매일매일 아침마다 보셨다고 했다. 가끔은 이 중학교 운동장에서 영만군은 달리기 연습을, 어머니는 줄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엄마는 잘하는 게 너무 많다. 우리는 여름에 저녁마다 감골운동장에 모여서 운동을 했는데 엄마는 축구, 배드민턴, 줄넘기, 모두 너무 잘했다. 엄마의 운동하는 모습은 아프로디테 여신처럼 화려하게 빛나서 눈물이 찔끔났다...”
영만군이 일곱 살 때 쓴 일기



임세희의 길

임세희양은 10년 동안 클레이아트를 배웠다. 자격증도 땄고 백여 점의 작품도 남겼다. 점토로 만든 수많은 인형들, 냅킨아트, 빛나는 구슬들을 엮은 악세사리들이 세희양의 집에 가득하다. 점핑클레이 학원이 있던 선부동 다이아몬드 상가에서 세희양의 길이 시작된다. 그 길을 세희양의 엄마와 아빠가 함께 걸었다.
세희양이 엄마와 자주가서 머핀과 주스를 마시던 2층카페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또 다른 카페 나무그늘, 가끔 돈까스를 먹던 깁밥천국, 세희양과 가족이 항상 이용하는 엘리트 안경, 엄마와 머리를 하던 헤어 라벤더, 중학교 때 엄마와 요가를 배우던 핫요가는 다이아 몬드 상가 근처에 아직 그대로였다.
가족은 상가 앞에서 화정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화정4교를 건너 집까지 걷기도 했다. 어린시절 세희양은 화정천에서 자주 놀았다. 세희양의 엄마는 네잎클로버를 아주 잘 찾았다. 가족이 함께가던 와동체육공원과 근처 중국음식점 중국성도 그대로였다. 세희양은 1997년 8월3일 4시16분에 태어났다.



허다윤의 길

안산합동분향소에서 선부11단지 사거리로 걸어가니 건너편에 반쯤 무너져 내린 아파트가 보였다. 안산은 재건축 광풍이 무섭게 몰아치고 있다. 기억과 흔적들을 지우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 803동은 결국 사라졌다.
허다윤양이 5학년 때부터 살았던 그곳에서 다윤양의 길이 시작된다. 중학교 졸업 전 봄방학 때 아빠는 집에서 단원고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려 다윤양과 자주 이 길을 걸었다. 아파트앞 건널목을 건너 화랑유원지로 이어지는 길에서 단원고까지 다윤양은 친구 홍종용군과 매일 함께 등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종용군은 2013년 9월에 단원고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도 다윤양에게 말하지 않고 길을 돌아와 매일 다윤양을 기다렸다고 한다. 종용군은 수학여행 날도 캐리어를 끌고 다윤양을 기다려 함께 등교했다. 참사 후 진도 체육관에서 다윤양의 엄마는 종용군의 부모님을 처음 만났다. 참사가 있기 열흘 전 다윤양의 가족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고 이사를 위해 정리해 놓은 다윤양의 짐은 아직 풀지 못했다.
다윤양은 새 집으로 이사를 온 어느날, “엄마, 나 너무 행복해”라고 말했다. 엄마가 이유를 물으니 그냥 모든게 행복하다며 웃었다고, 그 말이 가슴에 남아 있다고 했다. 화랑유원지 저수지 산책길에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 곳에서 엄마와 다윤양은 자주 앉아있었다. 엄마는 바위에 앉아있는 다윤양의 사진을 매일 들여다 본다.

허다윤, 조은화, 남현철,
박영인, 고창석,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 허다윤양의 엄마는 아직 배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들의 가족들은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에 머물러 있고, 그렇게 그날 그대로 싸우고 있다고 미수습자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위해 힘을 보태달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이 길을 좀 더 다르게 걸어야 한다.



박성호의 길

단원고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왼쪽편에서부터 박성호군의 길이 시작된다. 화정천을 지나 화정 6교를 가기전 좌측 온누리병원 길목으로 접어들어 롯데마트와 오렌지팩토리 사거리 우측길로 계속걸으면 꽃눈 내린 놀이터가 나온다. 성호군의 단짝친구 심기윤군과 추억이 많은 곳이다. 성호군은 주로 둘째누나와 하교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성호군은 하늘 보는 것, 별보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서 성당 가는 길 언덕 육교 위 에서 친구들과 자주 별을 보았다. 수박과 포카리스웨트, 치즈가 들어간 음식을 좋아한 성호군은 선부동 성당가는길 초입에 있는 씨유편의점에서만 파는 오다리치즈라면을 누나에게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성당옆 메이찬 중국음식점에서 가족과 성당친구들과 자주 식사를 했다. 사제를 꿈꾸던 박성호군을 기억하며 함께 걸었던 둘째누나 박예나양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녁기도의 중요성을 성호가 알려줬어요. 아침기도는 안해도 저녁기도는 늘 하는데, 저녁기도는 하루를 마감하며 반성하는 의미가 커서, 내가 만약에 잠 든채로 죽으면 죽기 전의 고해성사를 하는 것과 같은 거니까, 굉장히 중요한 기도라고 성호가 이야기 해줘서, 저녁기도는 꼭 하려고 노력해요. 식전 식후 기도하면서도 생각하고, 식후기도는 또,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기도가 들어가 있거든요...”



오준영의 길

오준영군은 수업 후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려 매일매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단원고에서 안산세무서로 가서 엄마를 만나 단원고 건너편 길로 다시 되돌아 집까지 걸었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날은 중앙동 뉴코아까지 가서 엄마와 저녁을 먹고 근무가 끝날 때 까지 엄마를 기다렸다가 한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힘든데 왜 걸어다니냐고 했지만 엄마와 준영군은 손잡고 걷던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 길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웃었다. 엄마도 준영군이 기다릴까봐 퇴근하고 약속장소인 세무서 버스정류장까지 매일 달렸다. 시청 앞 건널목에 목련이 피는데 준영군은 목련이 시체 같아서 싫다고 했다.
꽃잎이 두꺼워 떨어지면 벌레가 꼬인다며 목련보다는 벚꽃이 더 좋다고 했다. 낮에는 밥같고 밤에는 별같은 꽃이라는 말도 남겼다. 인형을 참 좋아했던 준영군은 모든 인형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충전마곰, 희망아곰, 짜장면, 짜장밥, 삼겹살, 주먹밥, 된장, 찌개, 밥, 국, 지짐이, 설탕, 우유, 짜파, 짜왕, 짜짜, 돈까스, 판다, 흰다, 등등이다. 꿈돌곰돌 인형은 준영이고, 지킴빠곰은 아빠라고 했다. 준영군을 보내고 나서 잠을 잘 수 없던 그 시간을 엄마는 인형들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며 보냈다. 준영군과 추억이 있던 장소들이 안산의 재개발 광풍에 하나 둘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한시간 넘게 준영군의 길을 걷는데도 이야기가 넘쳐났고 많이 웃었다. 태봉추어탕 뒤에 준영이 집이 있다. 그 곳에는 준영이가 남기고 간 인형이 가득했다.



김시연의 길

김시연양은 유달리 친구가 많았다. 시연양이 고잔동 그린빌 15단지 길을 돌고 돌아 집으로 갔던 이유는 친구들과 함께 걷고 어울리기 위해서였다고 시연양의 길을 함께 걸으며 엄마가 설명해 주었다. 고잔동 그린빌 15단지 앞 정자는 시연양이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서 항상 모여 수다를 떨던 곳이다.

“모든 친구들과 다 친해지려고 해요.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애가, 뭐라 그러지? 의리가 있었어요.(웃음) 중학교 때부터 모였던 친구들이 있어요. 그 아이들이 화팸이예요 이름이. 화팸이 뭐냐면 화장실 패밀리라고 쉬는 시간만되면 화장실에 모여가지고 만나는 여자애들. 지금도 그 이름으로 애들이 계속 만나고 있구요. 세월호 사고 났을 때도 아이들이 제일 먼저 자기들끼리 돈 모아서 사고 2일 후에 속옷랑 신발이랑 사가지고 애들 부모님과 내려와서 하루종일 봉사하고 그러고 갔거든요. 자기네 학교에서도 모금해서 안산시에 보내고 그리고 시연이가 올라왔을 때 JTBC에서 먼저 방송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친구들이 알게 됐어요. 시연이가 좋아하는 귤에다가 편지를 하나하나 써서 귤로 만든 화려하고 예쁜 화환에 화팸 친구들이라고 써서 장례식장에 보냈더라구요. 근데 아이들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왜 안오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거기에서 3일 동안 씻지도 않고 얼굴도 새카매지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아이들이 장례식장에 오기 전에 백화점에 들러 비싼 화장품 세트를 돈을 모아 사가지고 온거예요. 그애들 지금도 가끔 만나요. 엄마들도 그전에는 몇 명만 알았지 다 알진 못했는데 시연이 보내고 엄마들을 다 알게 됐어요. 저는 괜찮은데 그 엄마들이 어려워해서 연락도 잘 못했었는데 작년에 시연이 친구 한명을 더 보내면서 엄마들이 아주 끈끈해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엄마들도 애들도 같이 만나요.”

친구들과 자주가던 롯데리아, 약속장소였던 아파트 앞 시계탑,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길을따라 화정16교를 건너 시연양은 친구들과 안산중앙도서관 매점에 가는 것을 즐겼다. 연극부 부장이었고 친구들이 너무나 좋아했던 박시연양은 깨박이 시연의 노래 ‘야! 이 돼지야’라는 곡도 남겼다.





아이들의 길 함께 만든 사람들

박은미(허다윤 어머님) 박예나(박성호 누나) 배미선, 임종호(임세희 부모님) 이미경(이영만 어머님)
임영애(오준영 어머님) 윤경희(김시연 어머님)
무브먼트 당당
김현아 김민정 정유미 최정현 이재민 왕용석 이도경 이신실 서재영 신현경 원채리 이규리
텍스트 정리
최정현 이재민 이도경 원채리 정유미 김민정
지도 정리
이재민 왕용석 이도경
일러스트
왕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