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순례길2017

순례에 부쳐



외국 예술가들과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천막을 방문한일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알리기 위해 그들과 함께 왔다고 하자 희생자 가족 중 한 분이 브리핑을 해주셨다. 참사 당일부터 현재까지의 상황 전개, 정부가 특조위의 진상 규명 활동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방해하는지, 세월호 선박 인양을 어떤 식으로 차일피일 미루는지 등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통역을 해야 했지만 통역자는 말을 끊을 수 없었다. 가족분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셨다. 하실 말씀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 예술가 중 한 사람이 자신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후에 그 분에게 물었다.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왜 울었냐고. 그녀가 답했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말투, 어조, 표정에서 다 느껴졌다고. 그리고 그녀가 덧붙였다. “나도 아이가 있는 엄마니까요.”

희생자 가족들의 말들은 한없이 넘쳐난다. 그러면서도 늘 말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해결되어야 할 일은 무한정 쌓이는데 망각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는 모든 이가 진실을 규명하는 데 함께 할 수 있는 지지자요, 동반자요, 메신저이다. 그렇게 말을 하고 또 말을 하면서 참사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활동가가 되었고 전문가가 되었고 웅변가가 되었다.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였다.

세월호 참사 후 삼년이 지났다. 희생자 가족들이 그 같은 변화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동안 세상에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물론 대통령 탄핵이 있었다.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 소추안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헌법 재판소는 끝내 세월호 참사를 탄핵 사유로 인용하지 않았다. 다만 보충의견에서는 이런 구절이 발견된다.

“대통령의 불성실 때문에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헌재의 탄핵 인용문은 대통령이 범한 잘못의 위법성과 위헌성의 정도가 파면 사유에 부합하는지를 지극히 차분하고 합리적인 어조로 진술했다. 그런데 보충의견의 위의 구절은 마치 2015년 처음으로 진행된 <안산순례길> 팸플릿에 나온 구절, “국가여,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슬픈 사람이 되어라”에 대한 응답 같았다. 위의 구절은 법의 차가운 합리성을 보완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너무나 미약했다.

416가족협의회의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 직후 절규했다.

“왜 세월호만 안 됩니까! 왜 우리 애들만 안 됩니까!
우리 애들 왜 죽였는지, 그거 하나만 알려 달라는데.
왜 내 새끼 죽였는지, 그것만 알려 달라는데.
왜. 우리 애들만 안 됩니까.
제발, 알려 주세요. 제발 알려 주세요.
왜 죽었는지. 박근혜가 도대체 무슨 짓거리 하느라고 우리 애들 죽였는지 알려 달라고.
제발 그거 하나만.
나 죽기 전에 그거 하나만 알고 죽자고요 제발.
왜 우리만 안 돼요 왜. 제발...”

다시 묻자. 무엇이 변했는가? 망가진 국가 시스템의 수장이 파면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 과연 무엇이 변했는가? 그렇다. 세월호가 인양됐다. 가라앉았던 세월호가 만신창이가 되어 우리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나 건져 올린 것은 단순히 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철 같은 무관심의 장막으로 은폐된 거대한 진실이었다. 아직도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아홉 명이 있고 그날 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2014년 4월 16일, 생명, 안전, 인권, 일상, 인간성, 존엄, 신뢰, 그리고 행복,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 알게 됐다. 해가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사라진 것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되돌아오더라도 사라진 것들의 일부만, 그것도 느린 속도로 가까스로 돌아올 뿐이다. 세월호가 인양됐지만 아직도 돌아와야 할 존재와 진실들은 너무 많다. 그날 너무 많은 이들이,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후 삼년이 지났다. 그리고 세 번째 <안산순례길>이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도구들로 순례길을 개척하고 시민들과 함께 안산 거리를 걷는다. 모든 것이 사라져갈 때 어떤 사라짐에 대한 기억은 사라짐 전체를 지연시키며 심지어는 되돌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스스로에게, 동료들에게, 시민들에게 제안한다.

2014년 4월 16일을 기점으로 생각해보자. 그날 사라진 생명들과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았어요. 그날 이후부터 우리는 가까스로 존재하게 된 거예요."

순례란 언제나 사라진 과거와 기억과 맞닿아 있다. 추상적 기념이 아니라 구체적 체험의 방식으로 과거에 가 닿으려는 노력이 순례이다.
순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 양식을 다른 방식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선조가 아니라 후예다. 우리는 미래에 번영할 후손의 선조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에 죽은 자들과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난 생존자들의 후예다. 우리가 생존자다.

역사를 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경이로움과 경악스러움. 승리자들은, 스스로를 기원으로, 선조로 보는 이들은 언제나 전자를 택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도 그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진보한다. 그들에게 역사는 자부심의 원천을, 승리의 전리품을 무한히 품은 보고이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은 자의 후예, 생존자로 스스로를 보는 우리는 경이로움이 아니라 경악스러움으로 역사를 본다. 억눌린 자들, 죽은 자들이 원했던, 살려했던, 살 수 있었던 삶이 이 땅에 실현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 없다. 어리석은 자를 권자에서 물러나게 하고 어리석은 자들 중 가장 현명한 자를 권자에 올린다 해도, 그것을 또 다른 승리와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길 수 없다.

우리는 순례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고 다시 돌아간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다시 시작한다. 이때 예술은 회귀와 재출발을 위한 도구, 길잡이, 지팡이이다. 우리는 질문한다.

“당신은 기억한다는 것이 실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망각한다는 것이 실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사라진 사람들과 사라진 진실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우리에게 모든 살아남은 자들은 우리의 질문에 동참하는 지지자요, 동반자요, 메신저이다. 우리의 말은 넘쳐나고도 모자라다.



대표집필  심보선
이 글은 ‘안산순례길2017’ 책자에 수록된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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