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순례길2018

순례에 부쳐



세월호 참사 후 4년이 지났다. 가장 큰 변화라면 참사 당시 대한민국의 안전을 책임지던 수장이 탄핵된 일이다. 헌법재판소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전대통령의 책임이 탄핵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두 재판관은 보충의견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되어 대규모 피해가 생기거나 예견되는 국가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음에도, 상황의 중대성 및 급박성 등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피청구인의 대응은 현저하게 불성실했다”“박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여야 할 구체적인 작위의무가 발생하였음에도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헌법 제69조 및 국가공무원법 제56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변화하지 않았는가? 박근혜 전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직책수행의무 위반 행위들의 구체적 면모들, 그로 인해 당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4월 16일 이후 분향소 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원래 기능인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고 유예은 양의 어머니 박은희 씨는 [고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별식을 하는 게 맞나 하는 거죠. 이랬다가 단원고 교실처럼 약속만 붙들고 아이를 보내는게 맞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4 년 전 발인하는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 거죠...그런데 가족들은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 이라는 걸 저희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고 오신 분들에게 이게 시작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결연한 마음 그러면서도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위의 인터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것 같다. “다시 돌아간다, 다시 시작한다, 결연 하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반복할 때, 우리의 감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어떤 경험을 반복하면 할수록 새로움이 줄어들고 익숙함이 늘기 때문이다. 수많은 반복 행위는 결과적으로 자동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별 생각과 느낌 없이 늘 하는 루틴이 되어버린다. 일상의 평화란 사실 자동화와 루틴화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여전히 미수습자가 남아 있다. 진상규명과 안전사회라는 소망은 마치 바람 속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있다. 그 촛불을 함께 키고 지키던 사람들의 숫자는 줄고 있다. 그렇기에 세월호참사의 경우, 다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반복이 될 수 없다. 언제 촛불이 꺼지고 길을 잃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아니 어쩌면 더한 억울함과 비통함이 엄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다시 돌아가고 다시 시작하고...”라는 반복의 이미지는 <안산순례길2018>에 참여한 작가들에게도 뚜렷했다. 4년째 안산시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동안 단원고 존치교실은 이전됐고 이제 분향소까지 철거됐다. 작가들은 ‘맴돌다’라는 열쇳말을 떠올렸다. 한 작가는 말했다.

“맴도는 것은 사라진다. 맴도는 기억은 희미해진다. 맴도는 노래는 결국 화음만 남고 나머지는 삭제되는 것과 같다.” 다른 작가는 또 말했다.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것, 잊히지 않는 것을 맴돈다.” 또 다른 작가는 “안산을 매년 맴돌다 보니 안산이 다른 도시 같고 다른 도시가 안산 같다.”

이렇듯 “맴돌다”라는 말 속에는 기억과 망각, 차이와 유사성이 서로 경합하며 공존하고 있다. 우리가 사라진 분향소 자리를 방문한다면, 혹여 그곳에 주차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단순히 ‘여기 주차장은 무료인가? 시간당 얼마지?’라는 의문만 품지는 않을 것이다. 그토록 거대한 분향소, 그토록 많은 아이들의 영정, 그토록 서럽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과 절규가 어떻게 주차장의 평범한 기능으로 대체될 수 있겠는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아직도 진실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 했는데.

<안산순례길2018>은 사라진 존재들과 남은 흔적들 사이를 맴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다짐도 아니요, 인지작용도 아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되살리고 드러내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의 기억을 나누고 합치고 이어 붙여 진실의 얼개를 짜고 또 다른 삶을 설계한다는 것이다. 그 삶-진실 속에는 생존자와 희생자, 남은 것과 사라진 것의 자리가 공평하고 나란하게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맴도는 동시에 나아간다. 가까운 발치와 머나먼 목적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사라지는 진실의 흔적들을 주워들고 나눠 쥐고서. 같은 자리를 다시 방문해도 거기서 우리는 매번 새로운 발견을 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길을 맴도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우리는 이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총연출의 글

윤한솔
시간이 참 많이 흘렀고 흐르고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희생자나 유가족들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불현듯 그렇게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조금씩 쌓여갑니다. 또, 참사의 기억 중 일부는 일상에 흡수되지 못하고 잔여물로 남거나 침전해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혈관에 침투한 세균처럼.

그와 동시에 참사 이후 내가, 우리가 겪은 고통, 그리고 구체적인 변화들은 날렵하게 깎여나가고 있고, 한없이 가벼워진 채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참사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명제는 누구에 의해,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바뀌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끔 나의 슬픔을 누군가 지켜본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걸 보면 고통이 느껴지니까요.

“수치스런 벌거벗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타자부터 감추고 싶어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수치심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자아가 자기자신에게 못박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요,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한 자기로부터의 도주에 대한 철저한 불가능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자아의 현전이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 경험으로 전환되는가, 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왜 이 작업을 계속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됐든 나한테 일어난 일이니까요”

“예술가에게는 ‘보인다’. 사람에겐 원래 보이고 들리지만, 모든 기능을 그런 인식에 돌리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 지각을 닫아놓고 있다. 물론 단은 채로 있어도 되지만, 예술가의 역할은 인간이 유용성을 이유로 닫아놓은 인식을 열어 지각을 확대하는 데 있다”
베르그송



대표집필  심보선
이 글은 ‘안산순례길2018’ 책자에 수록된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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